사람 얼굴을 자세히 보니 전부 꽃과 과일이었습니다, 아르침볼도의 〈사계〉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다 보면 유난히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작품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얼굴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전부 꽃과 과일, 채소와 나뭇가지로 되어 있는 그림입니다.
바로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사계〉입니다.
처음 보면 조금 재미있는 초상화처럼 느껴지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재미있는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르침볼도는 자연의 여러 요소를 하나의 사람처럼 조합하면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연과 인간, 시간과 권력에 대한 생각까지 한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꽃과 과일로 사람의 얼굴을 만들다
아르침볼도는 16세기 이탈리아 출신 화가로,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황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화가였지만, 우리가 지금 아르침볼도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평범한 초상화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꽃과 과일, 채소, 동물 같은 서로 전혀 다른 대상을 조합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게 만든 이른바 '합성 두상' 때문입니다.
〈사계〉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봄은 꽃으로, 여름은 과일과 곡식으로, 가을은 포도와 호박 같은 수확물로, 겨울은 나뭇가지와 식물의 모습으로 사람의 얼굴과 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단순히 계절에 맞는 식물을 아무렇게나 배치한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식물이 실제 사람의 눈과 코, 입술, 머리카락처럼 보이도록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의 얼굴로 보였다가, 한 부분씩 살펴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얼굴이 꽃과 과일의 조합으로 다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단순히 '신기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아르침볼도의 〈사계〉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네 개의 얼굴은 각각 하나의 계절을 나타내는 동시에 인간의 네 가지 삶의 단계도 상징합니다.
봄은 어린 시절, 여름은 청년기, 가을은 성숙한 시기, 겨울은 노년을 의미합니다.
즉 봄에서 시작해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가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시간이 반복되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는 생각이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각각의 계절에 대응하는 인간의 기질까지 연결됩니다.
봄은 다혈질적인 성격, 여름은 화를 잘 내는 성격, 가을은 우울하거나 사색적인 성격, 겨울은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순히 '꽃으로 만든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안에 계절, 인간의 나이, 인간의 기질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겹쳐 있는 것입니다.
아르침볼도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아르침볼도가 활동했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자연을 서로 연결된 하나의 질서로 바라보는 사고가 중요했습니다.
인간과 자연, 계절과 시간, 우주와 세계가 서로 대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르침볼도는 이런 생각을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시각화했습니다.
꽃과 과일을 하나씩 보면 각각은 그냥 자연의 일부지만, 그것들을 모으면 하나의 인간이 됩니다.
다시 말해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가 모여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계〉는 단순히 관람객을 놀라게 하기 위한 기묘한 그림이라기보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에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사계〉가 단순한 장식용 그림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브르에 소장된 〈사계〉는 1573년 제작된 작품들로,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겨울〉에는 작센을 나타내는 마이센의 교차된 칼 문장이 남아 있고, 〈여름〉에는 1573이라는 연도가 확인됩니다.
즉 이 작품들은 단순히 "재미있는 그림을 선물했다" 정도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자연의 요소들이 하나의 얼굴을 이루는 모습처럼, 서로 다른 지역과 사람들이 하나의 제국을 이루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루브르 역시 〈사계〉에 자연과 인간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원래 모습과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루브르에서 이 작품들을 봤을 때 흥미로웠던 또 하나의 사실은 최근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쳤다는 점입니다.
〈사계〉 네 작품은 2023년 5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약 8개월에 걸쳐 복원 작업을 진행했고,
2024년 6월부터 다시 관람객에게 공개됐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림 표면의 바니시가 산화되면서 색이 누렇게 변하고, 일부는 뿌옇게 보이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원 과정에서 단순히 색만 되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작품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던 꽃 장식이 아르침볼도가 처음 그린 것이 아니라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는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아르침볼도의 원래 구성은 검은색의 단순한 배경 위에 합성된 얼굴이 놓이는 형태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복원 과정에서 후대에 덧붙여졌던 꽃 장식을 제거하고 원래의 구성에 가까운 모습으로 되돌리면서, 얼굴이 훨씬 또렷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루브르 측은 복원 이후 네 개의 얼굴이 검은 배경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색감과 표정의 미묘한 차이도 더 잘 느껴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그림
사진으로 봤을 때는 '과일과 꽃으로 사람 얼굴을 만들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 작품 앞에 서서 얼굴을 하나씩 따라가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눈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꽃이나 식물이고, 코처럼 보이는 부분이 과일이나 채소이며,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역시 실제 식물의 잎과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 자세히 볼수록 자연의 조합으로 바뀌어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멀리 떨어져 보면 이번에는 또 하나의 얼굴로 완성됩니다.
이렇게 한 작품 안에서 '사람'과 '자연'이 계속 번갈아 보이는 것이 〈사계〉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신기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루브르에서 직접 보고 나니 왜 아르침볼도의 작품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얼굴이 사라지고 꽃과 과일이 보이고, 다시 멀리서 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사람으로 돌아오는 그림.
아르침볼도의 〈사계〉는 자연과 인간을 한 장면 안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아주 독특한 초상화였습니다.
참고 자료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정보 — 주세페 아르침볼도, 〈봄〉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정보 —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정보 — 주세페 아르침볼도, 〈가을〉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정보 — 주세페 아르침볼도, 〈겨울〉
루브르 박물관 — 〈아르침볼도의 사계〉 복원 자료
참고 자료와 본문에 사용한 작품 사진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직접 촬영했습니다.